tvN 새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연출 권영일 / 극본 임메아리)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이유가 되는 존재 ‘멸망’(서인국)과 사라지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계약을 한 인간 ‘동경’(박보영)의 판타지 로맨스다.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5/10 (월) 밤 9시 첫 방송
기획 의도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당신의 일생 단 하나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로또 맞게 해주세요.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취직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 외 등등.
이 모든 소원의 전제는 '나는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 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면,
당신이 단 100일 밖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의 단 하나의 소원은 무엇일까?
말해두건대 이 드라마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진짜 삶을 살게 되는 두 존재의 이야기다.
100일의 시간이 남은 시한부 탁동경,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나타난 존재 '멸망'.
그 둘이 만나 함께 하고 사랑한다.
이 100일간의 일기를 부디 함께 읽어주시길.
일기장을 덮었을 때
당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졌기를 바란다.
그저, 그뿐이다.
인물 소개
탁동경 / 28세 (박보영) 라이프스토리 웹소설 편집팀 주임
내 인생은 누구의 장난인지.
동경의 나이 열 살, 교통사고로 부모를 동시에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장례식장에 갓 일곱 살이 된 남동생 선경의 손을 잡고 앉아있었다. 아이라고 해서 다 모르지는 않아서 동경은 울지 않고 버텼다. 나는 울지 않는 착한 아이니까. 그러니 우리를 데려가세요. 우리를 길러주세요. 눈앞에서 자신들을 서로에게 떠맡기려 싸우는 어른들을 보며 그렇게 빌었다. 그날부터였을까. 운명이 걸어오는 못된 장난에 동경의 인생이 속수무책 넘어지기 시작한 게.
장난까나. 하나도 재미없거든?
그렇게 이모의 손을 잡고 내려온 제주도. 바람과 바다의 콜라보로 빚어진 유년기와 청소년기 덕분에 동경은 꽤 괜찮은 어른이 되었다. 누가 주지도 않은 눈치를 보는 버릇은 제주가 아니라 동경 스스로가 동경에게 준 것이었다.
웹소설 편집자는 세상의 눈치를 보다가 떠밀려 선택한 직업이었다. 원하는 직업이었나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원하는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건 그런 거였다. 목표도 원대한 꿈도 없는 삶. 그저 이어지기에 급급한 삶. 그래도 괜찮아. 이 정도면 되었다. 이 정도면 살만하다 생각했었더랬다. 순진하게.
뇌종양 선고를 받은 날, 동경은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싶었다. 이딴 거 정말 하나도 재미없다고 목줄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나는 이토록 운명의 눈치를 보는데 운명은 어떻게 하나도 내 눈치를 보지 않는지. 정말로, 정말로 동경은… 울고 싶었다.
물음표 만든 새끼 누구야.
저기요. 저한테 왜 그러시나요? 저기요? 왜 전가요? 인생이 온통 물음표의 향연이었지만 언젠가 느낌표나 마침표가 제 인생의 끝이 될지도 모른다고 아주 작은 희망쯤은 품고 살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히 물음표로 인생이 끝장나버리게 생겼다니……. 애초에 물음표가 왜 문장의 끝맺음을 담당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물음표 만든 놈 때문이잖아. 누가 그 놈한테 그런 생각을 심어줬지? 누가 그 놈을 태어나게 했지?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결국 분노의 끝은 다시 하늘로 향하게 되는 거였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소리 쳤다. 세상 다 망해버리라고. 이렇게 다 한 번에 끝장내버리자고. 그 말을 누가 진지하게 듣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HAPPY BAD DAY!
새벽 세시에 초인종 누르고 찾아온 이 미친놈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이 무색하게 그 미친놈은 자신을 ‘멸망’이라 소개했다. 그러고는 대뜸 동경의 소망을 이뤄주러 왔다고 했다.
아주 오랫동안 동경은 누군가 제게 대답해주길 바라왔다. 멸망과 함께하는 100일 동안 동경은 멸망이 제게 온 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물음은 세기와 문명을 건너 네게 닿았구나. 너는 그 많은 것들을 건너 내게로 왔구나. 멸망에게 사람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동경이었다. 사람이란 단어는 사랑과 닮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동경은 처음으로 누군가가 아닌 자신에게 물었다. 동경아 넌 뭘 원하니. 네, 저는 이 사람이, 이 사랑이 존재하길 원해요.
오래 미뤄온 운명의 답이 들려온 순간이었다.
탁선경 / 25세 (다원) 동경의 동생, 취준생
2021, 대한민국의 누나들을 빡치게 할 최악의 동생이 온다!
일곱 살에 부모를 잃었지만 대신에 엄마를 두 명이나 얻었다. 이모인 수자와 누나인 동경이 그 두 명의 엄마다. 나이가 두 자리인 것과 한자리인 것은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걸까. 열 살에 이모 인생에 얹혀살게 된 누나 동경은 주지도 않는 눈칫밥을 혼자 다 먹었고, 일곱 살이던 자신은 눈칫밥이 다 뭐냐 싶게 하루 네 끼, 컨디션 좋을 땐 다섯 끼씩 꼬박 챙겨먹으며 컸다. 아마도 자신이 먹을 눈칫밥을 누나가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하고 생각이야 한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여서 그렇지. 누가 그래 달라고 했나. 그걸로 생색낸다면 선경도 할 말이야 있다.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누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아무 꿈도 목표도 없는 누나와 달리 너무 많은 꿈과 너무 많은 목표가 있어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저지르고 안 되면 수습은 누나한테 부탁해볼까? 성공하면 어차피 누나한테 한 방에 갚아줄 거니까. 그렇게 철없이 꿈을 향해 이리저리 두리번대고 있는데 믿기지 않는 말이 들려온다.
뭐? 우리 누나가 아프다고? 그럴 리 없어!
어제 누나한테 맞았는데 주먹 개 쎘다고!
강수자 / 48세 (우희진) 동경과 선경의 이모
인생 모토가 올인.
인생에 적당히 라는 것이 없다. 어릴 때부터 성질이 급했다. 한번 정하면 달려가기 바빴다. 달려가서는 마구 퍼부었다. 천성이 그랬다. 언니랑은 얼굴만 닮은 쌍둥이였지 성격은 정반대였다. 꼭 반을 쪼개서 그런 성질만 제게 퍼부은 것처럼 언니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을 땐 몸 반절이 꼭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자마자 보인 것은 어른들 틈에서 울지도 않고 손을 꼭 잡고 앉아있는 동경과 선경이었다. 언니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며 이런 부스러기들을 흘려놓고 갔구나. 서로 책임을 미루는 집안 어른들 틈에서 아무것도 재지 않고 소리쳤다. 제가 키울게요. 그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그때부터 쭉 수자는 연애도 결혼도 마다하고 3교대 카지노 딜러를 하며 동경과 선경을 키웠다. 그야말로 둘에게 인생을 올인한 거였다. 그런 수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올인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케빈은 카지노에서 수자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했다고 했다. 결혼해서 함께 캐나다로 가자고 했다. 동경이 대학 졸업반이 되고, 선경이 스물이 되자 동경과 선경은 수자의 인생에서 떨어져나갈 것을 선언했다. 미안했고, 고마웠고, 사랑했다. 그렇게 케빈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만끽 중이었는데 한국에서 난데없는 소식이 날아 들어온다.
인생을 올인해 키워온 부스러기가,
내 동경이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멸망 / 나이 미상 (서인국) 멸망
이 땅에 멸망 있으라.
그는 빛과 어둠 사이에서 태어났다. 빛의 마지막 자리, 어둠의 첫 번째 자리. 그곳이 그의, '멸망'의 고향인 셈이다. 무언가를 멸망시키기 위해 그가 하는 일은 그저 존재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그의 의지도, 그의 사명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운명일 뿐. 기실 의지도 사명도 없이 타고난 운명에 질질 끌려 살아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인간 또한 그렇다. 그래서일까. 그가, ‘멸망’이 굳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멸망은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멸망이 있되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하필이면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을 지어다. 멸망은 가끔 자신을 존재하게 한 신의 디테일한 주문사항을 떠올려보곤 한다. 그 양반도 참 귀찮고 섬세한 양반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중간관리자다. 중간관리자란 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법. 언제나 침착한 민원인만이 존재하는 건 아닐 테니 신은 이를 안배해 그에게 멸망의 권능과 함께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원래 책임에는 다소 욕설이 따른다. 그 책임이 멸망이라면 더더욱. 소년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이 노인 같이 메마르고 깊은 눈은 아마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을 원망 당한 이의 눈이 맑고 아름다울 수는 도저히 없을 테니.
멸망은 종합병원에 산다.
종합병원은 수도 없이 멸망이 벌어지는 곳. 그가 그곳을 자신의 안식처이자 매복지로 설정하고 여가생활로 삼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도. 어느 날은 암 선고를 했다가, 어느 날은 응급실에 나타났다가, 어느 날은 환자복을 입고 복도를 걷기도 한다. 그러나 병원 안 그 누구도 그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살아있는 자가 아니므로. 사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와 가까운 개념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이 있어야지 필연적으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덕분에 그는 안정적이게 여가생활을 즐기는 중이다. 한동안은 제 스스로 발령한 이 근무지에서 무료하지만 매력적이게 지낼 예정이었다. 이제는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는 그 날만 아니었어도.
HAPPY BIRTHDAY!
자신의 생일, 그는 단 한명의 인간을 선정하여 그의 소망을 이뤄준다. 신이라는 작자가 제 딴엔 선물이랍시고 준비한 작은 이벤트랄까. 그의 생일은 인간의 기준과는 다르다. 1년에 한번이 아닌 알 수 없는 우주의 주기를 아주 오래 지나쳐야 했다. 어쩔 땐 한 세기를 넘어야 했고, 어쩔 땐 한 문명을 넘어야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세기와 문명을 건넌 약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들의 소망이란 대부분 얄팍하고 단순해서 큰 노력 없이도 그는 찬사 받을 수 있었다. 단지 늘 그랬듯이 가볍게 선택했을 뿐.
"세상 다 망해라!"
멸망과 꼭 어울리는 까만 밤이었고, 별이 죽어갔고, 자신의 생일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이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동경을 골라 들었다. 그게 제게 잘못 온 선물인줄은 꿈에도 모르고서.
"니가 죽었으면 좋겠어. 죽어봤으면! 그럼 내 마음 알 테니까!"
너의 그 말에 코웃음을 쳤었나. 그러나 결국 네 말이 다 맞았다. 나는 너와 함께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 시한부인 동경과 함께 하는 100일. 그의 마음에 이상한 소망 하나가 싹 트기 시작했다. 살아도 죽어도 이룰 수 없는 소망. 살아있고 싶다. 그래서 너와 함께 죽어버리고 싶다.
차주익 / 33세 (이수혁) 라이프스토리 웹소설 편집팀장
타고난 여유에는 이유가 있는 법.
주익은 요즘 애들의 장래희망이다. 참고로 요즘 애들의 장래희망은 유투버, 연예인, 공무원, 건물주, 건물주의 자녀 등이 되시겠다. 그 중 제일 되기 힘든 것이 건물주의 자녀. 이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직업(?)이기에 그렇다. 원했던 스펙은 아니었으나 달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저도 저만의 길이 있다구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그런 삶은 살지 않을 거예요! 하고 울면서 포르쉐로 강남 한복판을 질주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주익은 주제파악이 잘 되는 사람이었다. 노력해서 이룬 것이 아니니 내세울만한 것도, 그렇다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제파악은 주익이 가진 것 중 가장 큰 재능이었다. 주익의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이 묘하게 여유 있어 보여. 그럴 때마다 주익은 그저 씩 웃고 말았다. 묘하게라뇨. 대놓고 여유 있는데.
모든 것은 계획대로 완벽히 꼬이고 있어.
주익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원은 해주었으나 퍼붓지는 않았으며 카드 믿고 빈둥빈둥 노는 꼴을 절대 봐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재능을 살려 취업을 했다. 주익의 재능, 주제파악. 출판업계는 그것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업계였다. 고르고 골라 아버지 건물에 세 들어있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물 흐르듯 건물관리를 맡기며 펜트하우스를 내줬다. 모든 것이 우연 같았으나 사실 모든 것이 주익의 계획대로였다. 출퇴근이 쉽고 빠른 곳을 직장으로 삼아서 시간을 죽이다 아버지의 수많은 건물 중 하나, 되도록이면 관리하는 이 건물을 물려받는다. 그 사이 수입은 편법으로 증축해나간다. 될성부른데 아주 조금 모자란 작가를 골라 출판사 모르게 1대1로 인센티브 계약을 하고 그들의 웹소설을 최선을 다해 TOP 10위권 안으로 올려놓는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허나 주익은 몰랐던 것이다. 시간을 죽이는 것. 되도록 오래오래 죽이는 것. 그것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음을. 게다가 될성부른데 조금이 아닌 아주 모자란 작가 중에 그녀가 있을 줄은. 주익의 완벽한 계획은 그렇게 완벽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완벽. 주익이 호구만 아니었다면 쓸 수 있는 표현이었을까?
떡 하나 줬더니 잡아먹던데요.
모든 것이 그 빌어먹을 떡 때문이다. 떡의 역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옆집 수영꼴통이 과외 구한다니까 내일부터 옆집으로 출근해." 아버지의 말 하나로 주익과 수영꼴통, 그러니까 현규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인연이 끈질기게 십년을 이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떡처럼 끈덕하게 현규는 주익의 팔자에 들러붙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그 떡을 안 주는 건데.
수능 전날 과외 선생 노릇한답시고 줬던 떡 하나가 파국을 불러왔다. 떡의 나비효과라고나 할까. 그 떡을 먹고 급체한 현규는 수능시험장 대신 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그 바람에 도피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바람에 사귀던 지나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 바람에 그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지금, 9년 후에 주익은 되도 않는 작가랑 계약을 하게 되었다. 이 되도 않는 로맨스작가 나지나와.
되도 않는 로맨스는 장사가 되질 않는다. 되도 않는 로맨스만 겪은 작가 또한 장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대로 알려주려고 했을 뿐인데. 정말로 그뿐이었는데. 왠지 이 알려주는 로맨스에 흔들리는 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인 것만 같다. 로맨스의 무서운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그걸 깨달은 순간 주익에겐 새로운 계획이 생긴다. 세상은 그 계획을 짝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자고로 계획은 꼬이라고 세우는 법, 최고의 짝사랑에는 최고의 시련이 따르는 법이다.
이현규 / 29세 (강태오) 카페 사장
그에게서는 늘 비누냄새가 난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어디 가서 물에 빠져 죽을까봐 시킨 수영이었다. 그런 아들이 어린이 취미 수영에서 시작해 안 죽고 수영선수까지 되리라고는 이 과보호 부모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딱히 세계 최고를 노리진 않았지만 공부보다야 물속에 있는 게 좋았기 때문에 교복 대신 수영복을 입는 생활에 만족했다. 소독약을 푼 물 속에 하루를 보내다보면 언뜻 언뜻 제 몸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하루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몸을 빡빡 씻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서는 늘 비누냄새가 났다. 늘 땀 냄새로 범벅인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그의 비누냄새는 독보적이었다. 여학생을 떼로 홀리기에 충분한 냄새였다. 그 떼 중에서 그녀도 있었다. 나지나. 현규의 첫사랑이었다.
소년은 자라지 않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열여덟 지나는 다짜고짜 쳐들어와 무슨 멱살을 잡듯 고백했다. 좋아해! 열여덟 현규는 그 고백에 멱살 잡혀 단시간에 사랑에 빠졌다. 손 하나 잡기도, 발 맞춰 걷기도 어려운 풋사과 같은 사랑이었다. 그 풋사랑이 소년을 움직였다. 평생 하지 않은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사랑 때문이었다. 오로지 지나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 그러려면 반드시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규의 여자친구 지나는 공부를 그럭저럭 잘했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은 결코 만능이 아니었으니…….
해보지 않은 공부가 체질에 맞을 리 없었고, 현규는 흐르는 대로 흘러가다 벽에 부딪치면 그대로 도망치는 인간이었기에 그의 강한 의지는 곧 강한 도망의지로 변하고야 말았다. 그러다가 결국 현규는 도피유학을 선택했다. 사랑으로부터, 쪽팔림으로부터 도망친 거였다. 그렇게 현규의 첫사랑은 흐지부지 끝났다. 도망침으로써.
두 번째 성장통.
수영을 해왔으니 수영을 계속 했을 뿐 그리 큰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는 곧 수영을 접었다. 수영으로 승부를 보기에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게 수영에 진지한 인간들이 많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 일 저 일 기웃거리다 과보호 부모를 졸라 카페를 차렸다. 같이 사는 주익을 졸라 주익이 관리하는 건물 1층에 저렴하게 세도 들었다. 모두를 졸라 차린 카페는 성황이었다. 수영으로 다져온 몸매와 쓸 만한 미소가 그의 영업비법이랄까. 그렇게 나름 스물아홉의 멋진 남자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지나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나를 만나고 나서야 현규는 자신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끝없이 도망만 치고 있었다. 모자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지 않았고, 끝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항상 멈춰 서고야 말았다. 현규는 그만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 그만 성장하고 싶었다.
현규는 이번에야 말로 부딪쳐서 깨져보려고 한다. 이 사랑이라는 벽에. 나지나라는 놓쳐버린 골인지점에. 해온 게 수영뿐이라 출발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건 도가 텄다. 결과는 고개를 들어봐야만 알 것이다.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막 휘슬이 울렸으므로.
나지나 / 29세 (신도현) 웹소설 작가
작가치고 예쁘시네요.
소싯적에 아이돌 해볼 생각 없냐는 제안을 숱하게 받았더랬다. 학창시절 번호 없는 문자로 사랑고백을 받은 경험도 다수 있었더랬다. 근데 이상하게 작가가 되고나서부터 자꾸 이런 소리를 듣는다. "작가치고 예쁘시네요.", "작가처럼 안 생기셨어요." 칭찬이라고 하는 걸까 시비라고 거는 걸까? 아, 예. 제가 눈이 한 세 개쯤은 달렸어야 했는데 거 미안하게 됐수다. "로맨스소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쓰시나 했더니 연애를 많이 해보셨나봐요." 이건 칭찬도 시비도 아니다. 그저 나 혼자 아플 뿐. 말로 맞은 자리가 아파서 지나는 언제나 애매하게 웃고 만다. 잘 쓰지도, 많이 해보지도 못한 것이 못내 쓰려서.
비법은 없구요. 인소와 판소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처음부터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다년간 다져진 인소와 판소 구독 실력이 지나를 여기까지 자연스럽게 이끌고 왔을 뿐. 자고로 고급독자 3년이면 클리셰를 읊고 클래식을 꿰뚫는다 했다. 그 클리셰와 클래식이 감히 자신을 언어영역 1등급에 이어 국문과까지 진출하게 했노라고 지나는 회상한다. 왜 혼자 회상씬을 찍고 있냐면 눈앞에 하얀 한글창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글 쓸 때는 글 쓸 생각 말고는 별 생각을 다 할 수 있는 법이거든.
통장에 첫 정산금액이 찍힌 날, 지나는 바로 회사를 그만뒀다. 그대로 겁도 없이 직업작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나를 고용하고, 내가 나를 부려먹고, 내가 나를 혼내야 하는 이 프리랜서의 길이 이토록 꽃길일 줄은.
꽃길은 꽃길인데 장미꽃길이야. 예쁜데 아퍼. 엄청 아퍼.
첫끗발이 개끗발이라고 했던가. 별 생각 없이 쓴 첫 작품이 중박을 치고 고통과 노력을 쏟아 부은 두 번째 작품은 폭망했다. 짧게 끝내고 다음 작품에서 대박을 노리자는 담당 편집자 동경의 말에 가타부타 말없이 연재를 종료했다. 그리고 다시 칼 갈아 준비한 세 번째 작품은… 대폭망. 그래, 거기까진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첫 연재, 첫 회부터 꾸준히 댓글을 달아 왔던 독자가 네 번째 작품에 [실망이네요] 댓글을 단 순간 지나 안에 있는 인내심과 자존심 그 외 등등 심心이란 심心은 다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모든 종류의 심心을 위해 악마의 손이든 귀신의 손이든 잡겠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에 차주익이 나타났다. 손대는 모든 웹소설을 TOP 10 안에 반드시 올려놓는다는 그 신의 편집자 차주익이. 근데 그 유명한 차주익이 아는 얼굴일 줄은 몰랐는데?
차주익이 자신이 아는 그 얼굴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과거에서 온 악마, 흑역사에서 온 귀신. 그것은 차주익이 아니라 자신이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벌인가 기회인가. 기회지, 기회야. 암. 하지만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일이 이토록 견고한 스킨십을 요하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몰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그러나 모르고 해버린 것들은 언제나 위대하고 위험한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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